게시판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제목 빈센트權
작성자 권오* [2020-08-14 16:11:24]
이메일 ockhan88@gmail.com
첨부파일
첨부된파일갯수 : 1
성인 빈센트 권.pdf

빈센트권의 족보는 찾을 길이 없고...

=================================

 

코리아! 최초의 천주교 세례자, 수사(修士)

 

殉敎者 빈센트와 두사람의 權慄 그리고 洪浩然

 

천주교 성인(聖人)에 권씨가 3, 홍씨가 3명이고 그 다음 준성인인 복자(福者)는 권씨가 3명 홍씨가 7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 최초의 세례자는 이승훈(평창이씨,李承薰, 1756 1801)이고 17341, 북경에서 선교사 그라몽으로 부터 받았고 최초의 순교자도 이승훈이며 첫 입국 선교사도 주문모(周文謨,중국인,1750-1801)라고 알고 있는 것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시에 경남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탕수바위(熊川,고문가이)에 그들이 쌓은 웅천왜성(熊川倭城)에 세스페데스(Céspedes)라는 스페인 신부가 15931227일 쓰시마 섬(對馬島)과 부산포를 거쳐 들어와 15956월까지 왜군 천주교인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고 세례, 고해성사 등의 왜군 군종신부 역할을 했고 조선인에게도 선교를 하고 많은 어린 사람을 잡아간 것도 사실이다. 지금 논란이 되는 대흥사의 황금십자가 반환과 세스페데스 공원 문제등이 있지만 당시에 이미 풍신수길이 천주교를 금지 했음에도 소서행장 주둔지인 창원지역에 은밀히 천주교를 전파하였다는 것이다. 곧 풍신수길이 이를 알게 되어 세스페데스는 일본으로 돌아간다. 물론 조선인 신자도 수천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제2의 십자군 전쟁이고 유태자본과 영국여왕 그리고 하수인인 선교사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설도 부정 할 수 없지만 그것은 차후에 다시 논하기로 한다.

당시에 많은 양민이 잡혀가는데, 의병장 권극평(權克平)의 조카뻘 되는 12세의 권씨 아이도 그 중 하나로 대마도에 있는 소서행장의 누이 동생집에 보내졌는데 세스페데스가 귀로에 본토로 데리고 가서 아마쿠사의 코레지오 신학원에 입학시킨다.

소서행장, 즉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세례명: 아우구스티누스, 1555-1600)는 일본 상인출신의 무장이고 임진왜란 당시 가등청정(加籐淸正)과 함께 2대 침략군 장수였으며 당시 대조선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의 장인이었다.

여기서 신학원을 나온 권씨 소년은 빈센트카운()토레스(1579-1626.6.20.)가 되어서 선교사의 길을 간다. 포루투갈.기니비소우,마카오 등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에 고향 태인(정읍시)의 권극평 장군의 친척 권극정의 친구인 실학자 이수광(1563-1629)과 교유한다. 이수광이 권빈센트의 부친등과도 잘아는 사이였다고 추정된다. 곧 일본으로 돌아와 선교활동을 하던중 덕천가강(德川家康)이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니 46세로 지금 나가사키(長崎)시 니시자카(西坂)언덕에서 화형을 당하고 만다. 당시, 1년간 감금 당하면서 온갖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회 보고서에는 조선인들이 자유를 빼앗긴 까닭은 하늘나라의 자유를 얻기위해서였다. 그 가운데서도 덕성이 특히 출중했던 사람이 있으니 .. 우리 수사(修士) 빈센트다.’ 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는 저의 영혼과 육체를 모두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 바쳤습니다. 제가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 배운 사랑과 용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화염속으로 사라져 갔다. 권문이 남인계열로 조선말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 권빈센트의 원력(願力)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복자(福者)이나 곧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르리라 믿는다.

그가 화형 당한 언덕은 골고다와 비슷하여 159726명의 천주교 신자가 풍신수길의 명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한 곳이기도하다, 그래서 그들은 성인(聖人)이 되었고 지금 일본26성인 순교지(日本二十六聖人殉教地, 西坂公園로 남아 있다. 아쉬운 것은 권빈센트의 흔적은 거기에 아직 없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 큐슈지방에 십여만명의 조선인 포로가 있었고 그 중 1만명이 천주교 신자였고 그들이 모금하여 만든 성 로렌조에게 바친 천주교회당은 지금 고려교(高麗橋) 건너편 신사(1637년 건립)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빈센트(승리자)은 조선인 의병 대장의 아들이고 정읍 출신이라는 것인데, 포루투칼령 마데리아 섬 카마치에는 이때 팔려간 조선인 노예들의 서글픈 망향가가 있다. 지금도 축제가 열리는데 그 노래는 놀랍게도 한국어이다. 게다가 이 섬은 유명한 축구선수 호나우두(Ronaldo)의 고향이니 차범근 닮은 그는 같은 핏줄(?)의 인연이 있는가 한다.

덕천막부가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으로 천주교를 탄압하자 천주교 신자를 가진 노예주인들은 급히 조선인 천주교 신자를 포루투칼 상인에게 헐값에 대량 넘기게 된다. 아니면 멸문지화의 연대 책임을 지게 되기 때문이다.

 

참으리다 CHAMARITA (조선노예의 포루투칼 생존 한국어 농악민요 채보 가사일부)참으리다 참아참아 아무리 슾퍼도 참아, 살려니까 죽게 참아 아무리 슾퍼도 참아 아 뭐래도 수구리고 이목숨 위해서 사니.. (중략) 할머니도 울었다오 도마리 모도시데 모데 (그만 돌아와요 돌아와)인데 여기다가 權校理 일어나 배재 木柵 쌓아 방어하니  목책 격퇴하니  天女和合 일등 聖者로다라는 가사도 나온다. 교리는 정5품 한림원 벼슬이고 권교리는 교리(校理) 권율을 말하는데 대덕산 배재(梨峙)신당에 모셔진 신령이라고 한다, 교리 권율이 바로 빈센트 권의 조상이라고 한다. 더구나 이 곡조는 정읍지방 민요조와 같다는 것이다.

그럼 이치대첩의 권율장군과 권율 교리는 무엇인가? 족보를 찾아보면 권교리 권율(1435- ? )은 추밀공파 18이고, 도원수 권율(1537-1599)은 추밀공파 22로 양촌 權近의 부친 권희(權僖,추밀공파 15, 1319-1405)의 후손이니 촌수로 따지면 멀고도 먼 관계이다. 탄생 연도도 100년 이나 차이가 난다. 그러면 이 임진왜란의 이치대첩과 금산전투 또 진주성 싸움의 권극평 의병장등은 관계는 무었일까?

또 여기서 홍호연(본명 洪雲海,1581-1657)이 등장하는데, 경남 산청군 오부면 중촌 출신이다. 진주성 함락시 가족과 흩어져서 열 살 어린 나이에 과도직무(鍋島直茂)의 부대에 붙잡혀 일본 규수(九州) 사가(佐賀)에 포로로 끌려가 중야좌위문(中野左衛門)가문으로 간다.

후에 그는 문필가로 이름을 날리고 400년 뒤에 그의 유품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전시회가 열리는 데 그것은 참을()’자 였다. 그리고 그는 후손의 안위를 위해 76세에 영주의 죽음과 함께 할복한다, 주목 할 것은 그 후손은 지금도 홍()이라는 성을 그대로 쓰고 있고 얼마전 경남 진주국립박물관에서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간 홍호연(족보명 雲海)의 형제인 홍천해(洪天海)12대손 한국의 홍성대와 홍호연의 14대손 일본의 홍항부(洪恒夫)는 서로 만나 부둥켜 안고 감격해 했다.

이에 대한 것은 權門과 관련한 것도 아니고 홍호연이 천주교 신자인지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한국 천주교사에 있어서 은 남다른 인연이 있기에 그리고 권씨의 참으리다 CHAMARITA’와 홍씨의 참을 ()’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이제 권빈센트(權重勝)’ 그의 원혼이라도 고향 태인(泰仁)에 묻어 주는 방법을 대종회 사업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일본 권씨종친회의 협조도 있을 것이다.

빈센트을 권중승(權重勝)이라 한 것은 빈센트(Vicente)승리자라는 뜻이고 그가 22일 것으로 생각되어 본 기자가 한 번 써본 것이니 괘념치 마시길 바란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가복음 제834) (글 권오철 기자)

홍호연의 글씨/ 예수회 보고서 기록/서판공원 처형장면/ 26 성인기념관/ 포루투칼 한국바느질 그리고 상투/ 나카사키 고려다리/ 도공들의 한글 도자기